[8화] 옥상 담배 연기와 팩스 소리 사이

​최 대리가 떠난 빈자리를 보며 문득 나의 20대 후반, 2003년의 초여름을 떠올렸다. 지금처럼 세련된 메신저도, 협업 툴도 없던 시절. 그때의 사무실은 훨씬 더 투박했고, 사람 사이의 거리도 지독하리만큼 가까웠다.

​당시 나를 가르쳤던 선배들은 지금 기준으론 이해하기 힘든 ‘거친 공룡’들이었다.

# “김 군, 팩스 들어왔는지 확인해!”

​2003년, 내 주무기는 기획서가 아니라 ‘팩스기’였다. 거래처에서 들어오는 흐릿한 글씨의 팩스를 받아 적고, 그걸 다시 깨끗하게 타이핑해서 보고하는 게 일과였다.

​내 사수였던 박 과장은 지독한 완벽주의자였다. 어느 날 오후, 내가 올린 보고서에 오타 하나가 발견되자 그는 사무실이 떠나가라 소리를 질렀다.

​”이거 하나 똑바로 못 해서 나중에 과장 달겠어? 가서 다시 해와!”

​지금이라면 ‘직장 내 괴롭힘’으로 회자될 법한 광경이었지만, 그때는 그 호통이 일종의 통과의례 같았다. 나는 억울함에 입술을 깨물며 옥상으로 향했다. 옥상엔 이미 담배 연기가 자욱했다. 선배들이 옹기종기 모여 ‘조직의 생리’에 대해 떠들던 그곳.

​박 과장은 옥상에서 나를 보더니 툭 한마디를 던졌다. “속상하냐? 야, 나 때는 재떨이 날아왔어. 인마, 정신 차려.” 그게 그 시절 선배들만의 투박한 위로였다.

# 소주 냄새 나는 ‘전략 회의’

​퇴근 시간 5분 전, 박 과장이 내 어깨를 툭 쳤다. “오늘 전략 회의 있다. 짐 싸.”

​전략 회의는 곧 회식이었다. 삼겹살 불판 앞에서 소주잔이 돌기 시작하면 업무 지시와 훈계가 뒤섞여 쏟아졌다. 밤 11시, 2차 호프집까지 끌려가서야 선배들은 자기들의 젊은 시절 무용담을 늘어놓았다.

​”김 군, 너는 복 받은 거야. 우리 때는 토요일도 당연히 출근했어.”

​숙취로 머리가 깨질 것 같은 다음 날 아침에도 8시까지 출근해 책상을 닦아야 했던 2003년의 신입 사원. 그때의 나는 박 과장이 정말 싫었지만, 동시에 그가 짊어진 가정을 위한 무게와 조직 안에서의 고독을 어렴풋이 배우기도 했다.

# 2026년의 거울 속에서

​세상은 변했다. 이제 팩스 소리는 들리지 않고, 옥상의 담배 연기도 사라졌다. 후배들에게 소주를 강요하거나 고함을 지르는 상사는 도태되는 시대다.

​하지만 가끔은 2003년의 그 투박한 ‘정’이 그립기도 하다. 오타 하나에 같이 밤을 새워주던, 호되게 혼내고도 슬쩍 소주 한 잔 사주던 그 무식하리만큼 진심이었던 선배들.

​최 대리는 나의 방식이 낡았다고 했지만, 나는 그 낡은 시대의 끝자락에서 배운 ‘끝까지 책임지는 마음’만큼은 버리고 싶지 않다. 2003년의 박 과장에게 내가 배운 건 보고서 작성법이 아니라, 조직이라는 거친 바다에서 파도를 견디는 법이었으니까.

​퇴근길, 편의점에 들러 캔커피 하나를 샀다. 2003년 옥상에서 박 과장이 건네던 그 캔커피 맛은 아니지만, 거울 속 쉰 살의 나는 여전히 그 시절의 신입 사원을 가슴 한구석에 품고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