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실의 마지막 불이 꺼지자, 거대한 통창 너머로 야경이 비로소 제 모습을 드러낸다. 화려하지만 차갑다. 마치 얼음 성 같다. 2화에서 고민했던 ISA니 IRP니 하는 숫자들은 지금 내 머릿속에 들어올 틈이 없다. 지금 내 뇌리를 가득 채우는 건 단 하나의 단어, ‘인사(人事)’다.

11월. 대기업에 이 시기는 겨울의 시작이 아니라, 단두대의 계절이다.
# “김 팀장, 고생했어.”
오늘 오후, 상무님 방에 불려갔다. 30분 남짓한 짧은 면담. 상무님은 내 실적 보고서를 보지도 않았다. 대신 따뜻한 차 한 잔을 내밀며 어깨를 툭툭 쳤다.
”김 팀장, 올 한 해도 참 고생 많았어. 우리 팀이 어려울 때 굳건히 지켜줘서 고맙고.”
그 짧은 순간, 수많은 생각이 스쳤다. 이건 위로인가, 아니면 이별의 예고인가. 대기업에서 ‘고생했다’는 말은 양날의 검이다. 내가 아직 필요하다는 신호일 수도, 아니면 이제 정리할 때가 되었다는 완곡한 표현일 수도 있다.
그의 눈빛에서 나는 어떤 확신도 읽어내지 못했다. 그저 나처럼, 그도 ‘위’의 눈치를 보고 있을 뿐이라는 것만 느꼈을 뿐이다.
# 사라진 이름들, 남겨진 불안
면담을 마치고 자리로 돌아오는 길, 복도는 평소보다 유난히 길게 느껴졌다. 내 또래, 나와 함께 밤을 지새우며 사원이 되고 대리가 되었던 수많은 ‘이 팀장’, ‘박 팀장’들이 지난 몇 년간 이 복도를 통해 소리 없이 사라졌다.
누군가는 ‘새로운 도전’이라는 포장지로 싸여 나갔고, 누군가는 그냥 어느 날 아침부터 자리에 보이지 않았다. 그들이 사라진 자리는 젊은 30대 후반, 40대 초반의 새로운 얼굴들로 빠르게 채워졌다.
회사는 거대한 기계다. 고장 나거나 낡은 부품은 언제든 교체된다. 50대 팀장인 나는, 지금 이 기계에서 얼마나 더 쓸모 있는 부품일까. 내년 이맘때, 내 이름은 이 조직도에 남아있을 수 있을까.
# 가장 어두운 밤, 가족이라는 무게
엘리베이터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은 지독하게 피곤해 보인다. 자랑스레(?) 이야기했던 ‘절세 통장’들도, 결국 내가 이 자리에 서 있을 때만 의미가 있는 것이다.
집으로 향하는 지하철 안, 사람들 틈에 끼어 아내에게 문자를 보낸다. [오늘 좀 늦었어.] 아내는 [고생했어요. 씻고 쉬어요.]라고 짧게 답한다.
문득 묻고 싶어진다. “여보, 만약 내가 내년부터 회사에 안 나가게 되면 어떨까?”
하지만 차마 보낼 수 없다. 그 말 한마디가 가져올 파장을 감당할 자신이 없다. 아직 대학생인 첫째, 고등학생인 둘째. 그리고 나만 바라보는 아내. 나의 불안은 곧 가족의 위기가 된다. 나는 여전히 단단한 가장이어야만 한다. 속은 썩어들어가더라도, 겉은 멀쩡해 보여야 한다.
# 다시 불을 밝히며
다시 아침이다. 나는 어제와 다름없이 넥타이를 맨다. 어제의 어둠은 잠시 옷장 속에 넣어둔다.
”팀장님, 굿모닝!”
활기차게 인사하는 박 대리를 보며, 나도 짐짓 밝은 표정으로 웃어준다. “그래, 박 대리. 오늘 기획안 마무리해야지?”
불 꺼진 복도의 침묵은 잠시 잊는다. 살아남았으니, 오늘도 살아내야 한다. 그것이 이 차가운 얼음 성에서 50대 팀장이 버티는 유일한 방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