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무너지는 신념

​후배가 떠난 빈자리는 생각보다 컸다. 2003년의 박 과장처럼 호통이라도 치고 싶었지만, 지금의 나는 그저 텅 빈 모니터만 바라볼 뿐이었다. 쉰 살의 팀장에게 조직은 점차 낯선 땅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렇게 마음이 헛헛하던 어느 날 저녁, 뜻밖의 전화 한 통이 걸려 왔다.

# “철민아, 오랜만이다.”

​대학 동창이자, 지금은 강력한 경쟁사의 본부장으로 있는 친구, 영석이었다. 우리는 입사 초년병 시절 서로의 정보를 공유하며 소주잔을 기울이던, 낡은 팩스 소리와 옥상 담배 연기를 함께 추억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친구였다.

​오랜만에 만난 영석이는 세련된 수트를 입고, 여유로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2003년의 그 투박했던 모습은 간데없었다.

# “우리 쪽으로 와라. 조건은 네가 상상하는 이상이야.”

​간단한 안부 인사가 끝나자마자 영석이는 본론을 꺼냈다. 스카웃 제의였다. 지금 연봉의 두 배, 넉넉한 인센티브, 그리고 은퇴 걱정 없는 계약 기간까지. 내가 고민했던 노후 자산 관리 계획들이 비루해 보일 정도의 파격적인 조건이었다.

​흔들렸다. 전무와 각을 세우며 위태로워진 내 입지, 후배들에게 느낀 세대 격차의 쓸쓸함. 이 모든 것을 한 번에 해결할 수 있는 탈출구처럼 보였다.

# “대신, 조건이 하나 있어.”

​영석이의 눈빛이 매섭게 변했다.

​”지금 네가 진행 중인 ‘그 프로젝트’, 핵심 기술 데이터만 좀 넘겨줘. 어차피 네가 만든 거잖아. 우리 쪽으로 와서 그거 기반으로 더 크게 키우면 돼. 그게 윈윈(Win-Win) 아니겠어?”

​숨이 턱 막혔다. 영석이가 말한 프로젝트는 우리 팀이 지난 2년 동안 밤을 지새우며 지켜온 우리 회사의 사활이 걸린 핵심 과제였다. 그것은 단순한 데이터가 아니라, 우리 팀원들의 피와 땀, 그리고 내가 선배들에게 배운 ‘끝까지 책임지는 마음’ 그 자체였다.

# 무너지는 신념 앞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 머릿속이 복잡했다. “조직은 깡이야!”라고 외치던 옛 선배들의 목소리와, 영석이의 여유로운 “윈윈”이라는 목소리가 뒤섞였다.

​나를 꼰대 취급하며 떠난 후배를 생각하면, 회사를 배신하는 게 복수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투박했던 선배들의 진심, 그리고 전무 앞에서 당당히 지키고자 했던 내 자존심이 나를 붙잡았다.

​나는 평생 직업 윤리라는 ‘신념’을 지키며 살아왔다고 자부했다. 하지만 50대라는 나이, 은퇴라는 현실의 무게는 그 신념을 위태롭게 흔들고 있었다.

아내는 거실 소파에서 잠들어 있었다. 그녀의 숨소리를 들으며 나는 다시 물었다. 나의 ‘의리’는 얼마인가. 나의 ‘신념’은 얼마인가. 어두운 방, 캔맥주 하나를 따며, 가장 무거운 계산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