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오전 11시. 평소 같으면 부하 직원들의 주간 보고서를 검토하며 날을 세웠을 시간이지만, 집에서의 나는 갈 곳 잃은 유령처럼 거실을 배회한다.
안방에서 아내와 속 깊은 대화를 나눴던 어제의 온기는 간데없고, 이제 내 앞엔 거대한 성벽처럼 닫힌 두 아들의 방문이 서 있다.
# “밥 먹었니?”라는 취조
큰애는 이제 고등학생, 둘째는 중학생이다. 한때는 내 퇴근 소리에 현관까지 버선발로 뛰어 나오던 녀석들이었다. 하지만 이제 녀석들에게 아빠는 그저 ‘가끔 용돈을 주고, 가끔 잔소리를 하는 거실의 손님’ 정도인 듯하다.
닫힌 문 너머로 들리는 빠른 타자 소리와 친구들과의 웃음소리. 그 활기찬 세계에 나는 초대받지 못했다. 용기를 내어 문을 열고 던진 한마디는 고작 이렇다.
”밥 먹었니?”
”네.”
대화는 거기서 끝이다. 취조하는 형사와 단답형으로 일관하는 용의자 사이의 팽팽한 긴장감이 흐른다. 대기업에서 수십 명을 앉혀놓고 한 시간 넘게 회의를 주재하던 팀장의 언변은, 사춘기 아들 앞에서는 0개 국어가 된다.
# 떡볶이 한 접시에 담긴 평화협정
점심 무렵, 아내가 외출하며 미션을 남겼다. “애들 데리고 점심 좀 챙겨 먹여.”
나는 비장의 카드를 꺼냈다. 녀석들이 좋아하는 동네 맛집 떡볶이와 치킨. 거실 테이블에 음식을 차려놓고 짐짓 무심한 척 소리쳤다. “나와서 먹어라.”
주뼛주뼛 나온 녀석들과 둘러앉은 식탁. TV 소리만 공허하게 울리는 가운데, 나는 슬쩍 요즘 유행하는 게임 이야기를 꺼내 본다. 사실 어제 퇴근길에 후배 사원에게 속성으로 과외받은 내용이다.
”그… 요즘 그 게임은 시즌 업데이트 했니?”
작은놈의 눈이 동그래진다. “어? 아빠가 그걸 어떻게 알아요?”
그 찰나의 눈맞춤. 직장에서 느끼던 서늘함이 잠시 잊히는 순간이다. 대단한 훈계나 인생 조언은 필요 없었다. 그저 녀석들의 세계에 아주 작은 발을 하나 들여놓는 것, 그것만으로도 식탁의 공기는 조금 미지근해졌다.
# 11년 뒤, 녀석들의 기억 속에 나는
떡볶이 국물을 닦으며 생각한다. 10여 년 뒤 은퇴를 하고 나면, 나는 녀석들에게 어떤 기억으로 남을까. ‘돈 벌어다 주느라 바빴던 사람’보다는 ‘가끔 말 안 통하는 농담을 던져도 같이 떡볶이를 먹어주던 사람’이고 싶다.
회사에서의 직급은 은퇴와 함께 반납하겠지만, ‘아빠’라는 직급은 정년이 없다.
오후가 되자 녀석들은 다시 각자의 방으로 들어갔다. 방문은 다시 닫혔지만, 아까보다는 덜 차갑게 느껴진다. 나는 소파에 깊숙이 몸을 기대고 창밖을 보았다. 팀장이 아닌, 아빠의 주말이 이렇게 저물어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