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화] 불 꺼진 복도, 살아남은 자의 침묵

사무실의 마지막 불이 꺼지자, 거대한 통창 너머로 야경이 비로소 제 모습을 드러낸다. 화려하지만 차갑다. 마치 얼음 성 같다. 2화에서 고민했던 ISA니 IRP니 하는 숫자들은 지금 내 머릿속에 들어올 틈이 없다. 지금 내 뇌리를 가득 채우는 건 단 하나의 단어, ‘인사(人事)’다.

11월. 대기업에 이 시기는 겨울의 시작이 아니라, 단두대의 계절이다.

​# “김 팀장, 고생했어.”

​오늘 오후, 상무님 방에 불려갔다. 30분 남짓한 짧은 면담. 상무님은 내 실적 보고서를 보지도 않았다. 대신 따뜻한 차 한 잔을 내밀며 어깨를 툭툭 쳤다.

​”김 팀장, 올 한 해도 참 고생 많았어. 우리 팀이 어려울 때 굳건히 지켜줘서 고맙고.”

​그 짧은 순간, 수많은 생각이 스쳤다. 이건 위로인가, 아니면 이별의 예고인가. 대기업에서 ‘고생했다’는 말은 양날의 검이다. 내가 아직 필요하다는 신호일 수도, 아니면 이제 정리할 때가 되었다는 완곡한 표현일 수도 있다.

​그의 눈빛에서 나는 어떤 확신도 읽어내지 못했다. 그저 나처럼, 그도 ‘위’의 눈치를 보고 있을 뿐이라는 것만 느꼈을 뿐이다.

​# 사라진 이름들, 남겨진 불안

​면담을 마치고 자리로 돌아오는 길, 복도는 평소보다 유난히 길게 느껴졌다. 내 또래, 나와 함께 밤을 지새우며 사원이 되고 대리가 되었던 수많은 ‘이 팀장’, ‘박 팀장’들이 지난 몇 년간 이 복도를 통해 소리 없이 사라졌다.

​누군가는 ‘새로운 도전’이라는 포장지로 싸여 나갔고, 누군가는 그냥 어느 날 아침부터 자리에 보이지 않았다. 그들이 사라진 자리는 젊은 30대 후반, 40대 초반의 새로운 얼굴들로 빠르게 채워졌다.

​회사는 거대한 기계다. 고장 나거나 낡은 부품은 언제든 교체된다. 50대 팀장인 나는, 지금 이 기계에서 얼마나 더 쓸모 있는 부품일까. 내년 이맘때, 내 이름은 이 조직도에 남아있을 수 있을까.

​# 가장 어두운 밤, 가족이라는 무게

엘리베이터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은 지독하게 피곤해 보인다. 자랑스레(?) 이야기했던 ‘절세 통장’들도, 결국 내가 이 자리에 서 있을 때만 의미가 있는 것이다.

​집으로 향하는 지하철 안, 사람들 틈에 끼어 아내에게 문자를 보낸다. [오늘 좀 늦었어.] 아내는 [고생했어요. 씻고 쉬어요.]라고 짧게 답한다.

​문득 묻고 싶어진다. “여보, 만약 내가 내년부터 회사에 안 나가게 되면 어떨까?”

​하지만 차마 보낼 수 없다. 그 말 한마디가 가져올 파장을 감당할 자신이 없다. 아직 대학생인 첫째, 고등학생인 둘째. 그리고 나만 바라보는 아내. 나의 불안은 곧 가족의 위기가 된다. 나는 여전히 단단한 가장이어야만 한다. 속은 썩어들어가더라도, 겉은 멀쩡해 보여야 한다.

​# 다시 불을 밝히며

​다시 아침이다. 나는 어제와 다름없이 넥타이를 맨다. 어제의 어둠은 잠시 옷장 속에 넣어둔다.

​”팀장님, 굿모닝!”

​활기차게 인사하는 박 대리를 보며, 나도 짐짓 밝은 표정으로 웃어준다. “그래, 박 대리. 오늘 기획안 마무리해야지?”

​불 꺼진 복도의 침묵은 잠시 잊는다. 살아남았으니, 오늘도 살아내야 한다. 그것이 이 차가운 얼음 성에서 50대 팀장이 버티는 유일한 방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