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 시즌의 서막을 알리는 면담을 마치고 돌아온 날 이후, 나는 집에서도 침묵을 매달고 살았다. 집이라는 공간에 들어서는 순간 나만의 비밀 금고 속에 굳게 봉인되었다.
회사에서 50대 팀장은 ‘위’와 ‘아래’를 보듬는 샌드위치지만, 집에서 50대 가장은 때로 그 자체로 거대한 장벽이 된다. 나의 불안이 아내에게 전염될까 봐, 나의 무력함이 그녀에게 짐이 될까 봐, 나는 입을 닫았다.
그리고 그 침묵은 우리의 거실을 차갑게 식혔다.
# 거실에서 안방까지, 가장 먼 거리
밤 11시. 아내는 안방에서, 나는 거실 소파에서 TV를 보고 있었다. 각자의 화면을 보고 있지만, 우리는 서로의 존재를 강렬하게 느끼고 있었다. 거실 소파는 1화에서 느꼈던 ‘광야’처럼 여전히 넓고 외로웠다.
아내는 사춘기 자녀들과의 소통에 지쳐 있었고, 나는 회사에서의 생존 싸움에 지쳐 있었다. 우리는 서로에게 위로를 구하기보다, 각자의 피로에 짓눌려 있었다. 안방으로 향하는 아내의 발소리가 유난히 무겁게 들렸다. 거실에서 안방까지, 그 짧은 거리가 오늘은 억만년처럼 느껴졌다.
# “당신의 침묵이 무거워.”
자정이 다 된 시간. 겨우 안방으로 들어가 침대에 누웠다. 아내는 이미 잠든 듯, 고른 숨소리를 내고 있었다. 나는 천장을 보며 다시 인사 상무의 “고생했어”라는 말을 되새기고 있었다.
그때, 아내의 숨소리가 바뀌었다.
”안 자고 뭐 해? 회사 일로 고민 있어?”
아내의 목소리는 너무나 솔직했고, 너무나 따뜻했다. 나의 침묵이 그녀에게 무겁게 느껴졌던 것이다.
나는 더 이상 비밀 금고를 지킬 힘이 없었다. 나의 불안을, 나의 고독을, 그리고 나의 무력함을 아내에게 쏟아냈다. 인사 시즌의 불안감, 사라진 이름들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여전히 단단한 가장이어야만 한다는 압박감.
# 다시, 넥타이를 매며
아내는 내 말을 묵묵히 들어주었다. 그녀는 내 손등에 자신의 손바닥을 가만히 얹었다.
”당신만 그런 게 아니야. 우리 모두 그래. 조금 쉬어가도 괜찮아.”
아내의 한마디는 내 침묵의 장벽을 허물었다. 나의 불안은 여전하지만, 더 이상 나만의 무거운 짐이 아니었다. 우리는 서로의 피로를 인정하고, 서로의 고독을 보듬었다.
다시 아침이다. 나는 어제와 다름없이 넥타이를 매지만, 오늘은 조금 더 가벼운 마음으로 집을 나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