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화] 당신의 숨소리와 나의 불면증

인사 시즌의 서막을 알리는 면담을 마치고 돌아온 날 이후, 나는 집에서도 침묵을 매달고 살았다. 집이라는 공간에 들어서는 순간 나만의 비밀 금고 속에 굳게 봉인되었다.

​회사에서 50대 팀장은 ‘위’와 ‘아래’를 보듬는 샌드위치지만, 집에서 50대 가장은 때로 그 자체로 거대한 장벽이 된다. 나의 불안이 아내에게 전염될까 봐, 나의 무력함이 그녀에게 짐이 될까 봐, 나는 입을 닫았다.

그리고 그 침묵은 우리의 거실을 차갑게 식혔다.

​# 거실에서 안방까지, 가장 먼 거리

​밤 11시. 아내는 안방에서, 나는 거실 소파에서 TV를 보고 있었다. 각자의 화면을 보고 있지만, 우리는 서로의 존재를 강렬하게 느끼고 있었다. 거실 소파는 1화에서 느꼈던 ‘광야’처럼 여전히 넓고 외로웠다.

​아내는 사춘기 자녀들과의 소통에 지쳐 있었고, 나는 회사에서의 생존 싸움에 지쳐 있었다. 우리는 서로에게 위로를 구하기보다, 각자의 피로에 짓눌려 있었다. 안방으로 향하는 아내의 발소리가 유난히 무겁게 들렸다. 거실에서 안방까지, 그 짧은 거리가 오늘은 억만년처럼 느껴졌다.

​# “당신의 침묵이 무거워.”

​자정이 다 된 시간. 겨우 안방으로 들어가 침대에 누웠다. 아내는 이미 잠든 듯, 고른 숨소리를 내고 있었다. 나는 천장을 보며 다시 인사 상무의 “고생했어”라는 말을 되새기고 있었다.

​그때, 아내의 숨소리가 바뀌었다.

​”안 자고 뭐 해? 회사 일로 고민 있어?”

​아내의 목소리는 너무나 솔직했고, 너무나 따뜻했다. 나의 침묵이 그녀에게 무겁게 느껴졌던 것이다.

​나는 더 이상 비밀 금고를 지킬 힘이 없었다. 나의 불안을, 나의 고독을, 그리고 나의 무력함을 아내에게 쏟아냈다. 인사 시즌의 불안감, 사라진 이름들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여전히 단단한 가장이어야만 한다는 압박감.

​# 다시, 넥타이를 매며

​아내는 내 말을 묵묵히 들어주었다. 그녀는 내 손등에 자신의 손바닥을 가만히 얹었다.

​”당신만 그런 게 아니야. 우리 모두 그래. 조금 쉬어가도 괜찮아.”

​아내의 한마디는 내 침묵의 장벽을 허물었다. 나의 불안은 여전하지만, 더 이상 나만의 무거운 짐이 아니었다. 우리는 서로의 피로를 인정하고, 서로의 고독을 보듬었다.

​다시 아침이다. 나는 어제와 다름없이 넥타이를 매지만, 오늘은 조금 더 가벼운 마음으로 집을 나선다.

​[제3화] 불 꺼진 복도, 살아남은 자의 침묵

사무실의 마지막 불이 꺼지자, 거대한 통창 너머로 야경이 비로소 제 모습을 드러낸다. 화려하지만 차갑다. 마치 얼음 성 같다. 2화에서 고민했던 ISA니 IRP니 하는 숫자들은 지금 내 머릿속에 들어올 틈이 없다. 지금 내 뇌리를 가득 채우는 건 단 하나의 단어, ‘인사(人事)’다.

11월. 대기업에 이 시기는 겨울의 시작이 아니라, 단두대의 계절이다.

​# “김 팀장, 고생했어.”

​오늘 오후, 상무님 방에 불려갔다. 30분 남짓한 짧은 면담. 상무님은 내 실적 보고서를 보지도 않았다. 대신 따뜻한 차 한 잔을 내밀며 어깨를 툭툭 쳤다.

​”김 팀장, 올 한 해도 참 고생 많았어. 우리 팀이 어려울 때 굳건히 지켜줘서 고맙고.”

​그 짧은 순간, 수많은 생각이 스쳤다. 이건 위로인가, 아니면 이별의 예고인가. 대기업에서 ‘고생했다’는 말은 양날의 검이다. 내가 아직 필요하다는 신호일 수도, 아니면 이제 정리할 때가 되었다는 완곡한 표현일 수도 있다.

​그의 눈빛에서 나는 어떤 확신도 읽어내지 못했다. 그저 나처럼, 그도 ‘위’의 눈치를 보고 있을 뿐이라는 것만 느꼈을 뿐이다.

​# 사라진 이름들, 남겨진 불안

​면담을 마치고 자리로 돌아오는 길, 복도는 평소보다 유난히 길게 느껴졌다. 내 또래, 나와 함께 밤을 지새우며 사원이 되고 대리가 되었던 수많은 ‘이 팀장’, ‘박 팀장’들이 지난 몇 년간 이 복도를 통해 소리 없이 사라졌다.

​누군가는 ‘새로운 도전’이라는 포장지로 싸여 나갔고, 누군가는 그냥 어느 날 아침부터 자리에 보이지 않았다. 그들이 사라진 자리는 젊은 30대 후반, 40대 초반의 새로운 얼굴들로 빠르게 채워졌다.

​회사는 거대한 기계다. 고장 나거나 낡은 부품은 언제든 교체된다. 50대 팀장인 나는, 지금 이 기계에서 얼마나 더 쓸모 있는 부품일까. 내년 이맘때, 내 이름은 이 조직도에 남아있을 수 있을까.

​# 가장 어두운 밤, 가족이라는 무게

엘리베이터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은 지독하게 피곤해 보인다. 자랑스레(?) 이야기했던 ‘절세 통장’들도, 결국 내가 이 자리에 서 있을 때만 의미가 있는 것이다.

​집으로 향하는 지하철 안, 사람들 틈에 끼어 아내에게 문자를 보낸다. [오늘 좀 늦었어.] 아내는 [고생했어요. 씻고 쉬어요.]라고 짧게 답한다.

​문득 묻고 싶어진다. “여보, 만약 내가 내년부터 회사에 안 나가게 되면 어떨까?”

​하지만 차마 보낼 수 없다. 그 말 한마디가 가져올 파장을 감당할 자신이 없다. 아직 대학생인 첫째, 고등학생인 둘째. 그리고 나만 바라보는 아내. 나의 불안은 곧 가족의 위기가 된다. 나는 여전히 단단한 가장이어야만 한다. 속은 썩어들어가더라도, 겉은 멀쩡해 보여야 한다.

​# 다시 불을 밝히며

​다시 아침이다. 나는 어제와 다름없이 넥타이를 맨다. 어제의 어둠은 잠시 옷장 속에 넣어둔다.

​”팀장님, 굿모닝!”

​활기차게 인사하는 박 대리를 보며, 나도 짐짓 밝은 표정으로 웃어준다. “그래, 박 대리. 오늘 기획안 마무리해야지?”

​불 꺼진 복도의 침묵은 잠시 잊는다. 살아남았으니, 오늘도 살아내야 한다. 그것이 이 차가운 얼음 성에서 50대 팀장이 버티는 유일한 방식이다.

​[제1화] 넥타이의 매듭은 여전히 단단하지만

​월요일 아침 7시 15분. 거울 속의 사내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윈저 노트를 완성한다. 20년 넘게 반복해 온 이 짓은 이제 눈을 감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거울 속의 나는 20년 전 그 청년이 아니다. 눈가에 자리 잡은 주름은 훈장이라기엔 조금 깊고, 정수리 위로 희끗하게 올라온 불청객들은 이제 염색약으로도 다 가려지지 않는다.

​나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흔하다는 ‘대기업 팀장’이다.

​# 위와 아래, 그 좁은 틈바구니에서

​사무실에 들어서면 공기가 달라진다. 예전엔 내 발소리에 팀원들이 긴장하는 줄 알았는데, 착각이었다. 이제는 내가 그들의 눈치를 본다.

​”팀장님, 이번 기획안 컨펌 부탁드립니다.”

​MZ세대 팀원이 내미는 태블릿 PC 앞에서 나는 짐짓 쿨한 척 안경을 고쳐 쓴다. 속으로는 ‘라떼는 말이야, 이런 건 밤새워서 보고서로 뽑아왔어’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오르지만, 꾹 삼킨다. 꼰대가 되지 않기 위한 처절한 사투다. 이 좁은 책상 위에서 나는 위로는 임원들의 실적 압박을 견디고, 아래로는 ‘워라밸’을 외치는 후배들을 보듬어야 하는 샌드위치 운명이다.

​# 11년, 그리고 남겨진 시간

​문득 달력을 본다. 정년까지 남은 시간은 대략 11년 남짓. 누군가는 “아직도 많이 남았네”라고 하겠지만, 나에게 이 시간은 모래시계 속 줄어드는 모래알처럼 선명하다. 20대엔 회사가 전부인 줄 알았고, 30대엔 성공이 전부인 줄 알았다. 그런데 50대가 되어보니 이제야 질문이 생긴다.

​”이 넥타이를 풀고 난 뒤의 나는 누구인가?”

​집에 돌아가면 두 아들은 각자의 방에서 나오지 않고, 아내는 드라마에 열중해 있다. 거실 소파는 내 차지지만, 때로는 그 넓은 소파가 광야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 다시, 첫 문장을 쓰며

​그래서 블로그를 시작하기로 했다. 누군가에게 가르침을 주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저 매일 아침 단단하게 넥타이를 매며 스스로를 다독이는, 이 시대 수많은 ‘팀장님’들과 ‘가장’들에게 “당신만 그런 게 아니다”라고 말을 건네고 싶어서다.

​나의 50대는 퇴보가 아니라, 가장 나다운 속도를 찾아가는 ‘재배치’의 시간이다. 자, 이제 로그인을 했으니 나의 진짜 이야기를 시작해 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