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선을 넘는 분노, 꺾이지 않는 자존심

오전 9시 주간 업무 보고 회의. 회의실의 공기는 평소보다 몇 배는 더 희박했다. 상무님 위, 소위 ‘라인’의 정점에 있는 전무가 직접 배석했기 때문이다.

전무는 우리 본부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인물이다. 그의 말 한마디에 멀쩡하던 프로젝트가 뒤집히고, 공들여 쌓아온 팀원들의 노력이 물거품이 되기도 한다.

​# “김 팀장, 자네는 너무 무거워.”

​전무가 내미는 건 무리한 일정의 신규 프로젝트였다. 우리 팀원들의 현재 업무량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사실상 ‘월화수목금금금’을 강요하는 계획이었다.

​”전무님, 현재 팀원들이 기존 프로젝트 마무리 단계라 인력 배치가 어렵습니다. 일정을 2주만 조정해 주시면…”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전무가 만년필을 탁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회의실 안의 모든 숨소리가 멈췄다.

​”김 팀장, 자네는 너무 무거워. 유연함이 없단 말이야. 위에서 하라면 하는 거지, 안 되는 이유부터 찾는 게 팀장의 역할인가? 50대쯤 됐으면 조직이 어떻게 굴러가는지 눈치로 알 때도 됐잖아.”

​’눈치’. 그 단어가 비수처럼 꽂혔다. 조직을 위해 20년을 헌신한 내 경력을 ‘눈치’라는 단어 하나로 격하시키는 순간, 내 안의 무언가가 툭 끊어졌다.

​# 넥타이가 목을 조여올 때

​순간적으로 치밀어 오르는 화를 억누르느라 주먹을 꽉 쥐었다. 예전 같으면 허허 웃으며 “검토해 보겠습니다”라고 넘어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내 뒤에는 나만 믿고 밤을 지새우는 팀원들이 있고, 내 안에는 아직 버리지 못한 마지막 자존심이 남아 있었다.

​”조직의 효율도 중요하지만, 팀원의 소모를 전제로 한 성과는 지속 가능하지 않습니다. 저는 팀장으로서 무리한 강행군을 승인하기 어렵습니다.”

​회의실엔 정적이 흘렀다. 상무님의 동공이 흔들렸고, 전무의 얼굴은 붉게 달아올랐다. 그는 아무 말 없이 나를 빤히 쳐다보더니 회의실을 나갔다. ‘자네, 내년 인사 때 두고 보자’는 무언의 경고가 공중에 흩날렸다.

​# 화장실 거울 앞에서

​회의를 마치고 들어간 화장실. 찬물로 세수를 하고 거울을 보았다. 이전에 걱정했던 ‘사라지는 이름들’에 내 이름이 한 발짝 더 가까워졌음을 직감했다.

​50대 대기업 팀장에게 전무와의 갈등은 곧 ‘퇴로 없는 전쟁’이다. 그동안 차곡차곡 준비해온 노후 자산 관리 계획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당장 내일이라도 짐을 싸야 할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엄습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마음 한구석은 시원했다. 팀원들을 지꼈다는 안도감인지, 아니면 나 자신을 지켰다는 위안인지 알 수 없었다.

​# 다시 걷는 복도

​사무실로 돌아오니 박 대리가 슬쩍 커피 한 잔을 내민다. “팀장님, 아까 정말 멋지셨습니다.”

​그 한마디에 울컥함이 올라왔다. 내 자존심의 대가가 얼마나 가혹할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오늘 하루는 후회 없이 보낼 수 있을 것 같다.

​내 이름 석 자의 무게는 조금 더 단단해진 기분이다. 남은 직장 생활 동안 이 넥타이가 나를 조여오더라도, 나는 내가 지켜야 할 선을 넘지 않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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